잃어버린 원더키드’ 데네르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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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원더키드’ 데네르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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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원더키드’ 데네르를 아십니까?

잃어버린 원더키드’ 데네르를 아십니까?


1990년대 마라도나를 놀라게 한 뒤 유럽 빅리그로 이적했으나 그 끝은 비극적인 교통사고였다. <포포투>가 꽃피우지 못한 영웅을 회고한다.


1994년 4월 19일 화요일 동이 틀 무렵, 호기심 많은 행인이 리우 데 자네이루 남쪽에 있는 보르제스 디 메데이로 가(街) 2225 번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호드리구 데 프레이타스 호수 근처에 있는 한 나무 근처에 흰색 미쓰비시 이클립스(번호판 DNR-0010)가 일그러져 있었다. 조수석부터 문에 이르기까지, 그 광경은 참혹했다. 데네르의 축 처진 몸이 완벽하게 뒤로 젖힌 좌석에 있었다. 겨우 몇 시간 전에 훈련장으로 향하던 그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말이다.


오전 5시 15분, 데네르의 친구인 오토 고메스 데 미란다는 상파울루부터 434km를 밤새워 달리다가 잠들어 운전대를 놓치며 양다리가 으스러지는 사고를 일으켰다. 1년 후, 그는 살해됐다. 그 옆에 있던 엄청난 유망주는 안전벨트에 목이 졸려 즉사했다.


이 시기에는 호마리우, 히바우두, 호나우두 같은 스타들이 삼바 축구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 사고가 아니었다면 또 다른 선수가 이 세계적인 영웅들과 함께 브라질 대표팀에 자리잡았을 것이다.


데네르 아우구스투 데 수자, 혹은 간단히 데네르로 불리는 그는 조가 보니또(아름다운 축구)를 꿈꾸는 브라질을 사로잡았다. 매끄러운 기술과 예측할 수 없는 드리블 그리고 공을 완벽하게 다루는 기술을 지닌 체구가 작은(신장 165cm) 공격형 미드필더는 1990년대 초반에 사람들을 웅성이게 만들었고, 만 19세였던 1991년에 A매치에 2경기나 출전했다.


유럽이 빠르게 위대한 선수가 돼 가는 그를 간과한 것은 아니다. 데네르가 죽기 3일 전, 바스쿠다가마에 그를 임대하며 1994년 60만 달러를 받았던 상파울루 전통의 강호 포르투게사는 분데스리가 소속 슈투트가르트에 이적료 300만 달러에 데네르를 팔았다.


대대적인 열광은 확실히 사실을 근거로 했다. 그는 바스쿠로 임대된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디에고 마라도나가 소속된 뉴웰스올드보이와 친선전에 출전해 아르헨티나 언론을 놀라게 했다. 경기는 0-0으로 끝났으나 33세 디에고 마라도는 작은 발전기처럼 뛰는 데네르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데네르는 마우리시오 포체티노를 포함한 상대 선수를 상대로 놀라운 기술을 선보였다. 그는 오른쪽 측면에서 공을 잡은 후 네 명 사이를 순식간에 헤집었다. 골키퍼 아스카르보네가 실점만은 막았다.


1990, 1994월드컵에서 브라질 대표로 뛰었던 바스쿠 주장 히카르투 호차는 <포포투>에 “마라도나는 턱이 빠졌었다”라고 말했다. “몇 년 후, 나는 뉴웰스에서 뛰었는데 로사리오 사람들은 그때도 그 경기를 이야기했다. 마라도나를 만나니 젊은 데네르가 죽은 걸 한탄하더라. ‘정말 좋은 선수였다’라고 말했다.”


마라도나는 더한 일도 했다. 데네르는 경기가 끝난 후 마라도나가 바스쿠 라커룸으로 찾아와 그 소년이 누구냐고 물으며 악수를 청했을 때 깜짝 놀랐다.



12세에 포르투게사 유소년팀에서 데네르와 처음 만나 절친해진 티쿠는 데네르가 마지막 경기에서 입은 옷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데네르는 종종 마라도나가 ‘작은 흑인 아이’에게 인사해야 한다고 고집부렸다는 농담을 했다. 너희 중에 마라도나가 와서 인사한 사람 있어?’라며 장난치는 걸 좋아했다”라고 티쿠는 회상했다.


상파울루 북쪽 끝자락에 있는 초라한 동네 빌라 에데에서 태어난 데네르는 마라카낭에서 열린 리우 주 챔피언십 경기에서 플루미넨세를 상대하다 퇴장당한 후, 가족을 보려고 집으로 돌아갔다.


바스쿠에서 데네르를 마지막으로 지도했던 자이르 페헤이라 감독은 “데네르는 라커룸에서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사랑스럽고 장난기 많은 소년이었다”라고 <포포투>에 설명했다. “다소 규율을 잘 지키지 않았기에 화요일 훈련에는 빠지지 말라고 말했다. 그래서 데네르는 연착 위험이 없는 자동차를 택해 친구에게 태워다 달라고 부탁했다. 불행히도 최악의 일이 벌어졌다. 전화로 사고 소식을 듣고 급히 호수로 달려가 데네르를 봤다. 완전히 망연자실했다.”


팬, 팀 동료, 방송국 카메라 기자들이 세상을 떠난 원더키드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다툼을 벌였고, 그들은 그가 성장하는 모습을 절대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예상대로 데네르의 국가대표팀 입성은 거창하게 이뤄졌다. 20세였던 1991년에 포르투게사가 코파상파울루에서 우승하는 걸 도왔고, 브라질이 20세 이하 대표팀 경기에서 9연승을 달리는 데 주역이 됐다. 바로 A대표팀으로 오른 데네르는 ‘헤이지뉴 두 카닌데(포르투게사의 작은 왕)’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데네르는 내 가장 큰 영웅이었다.” 포르투게사 유스팀 출신으로 바이에른뮌헨 전설이 된 제 호베르투는 3년 선배를 우상으로 삼고 감탄하며 성장했다. “(유소년 팀 방이 있는) 카닌데 스탠드 아래에서 살 때, 나는 데네르 경기를 보려고 학교를 빼먹곤 했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려고 수차례 볼보이 역할을 맡기도 했다.”


1993년, 데네르는 산토스를 상대로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고 골 후보에 오를 수 있는 골을 터뜨렸다. 벤치에서 환상적인 그 득점을 지켜본 포르투게사 감독 페페는 두 차례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고 산토스에서 리그 골만 400골 이상 터뜨리며 펠레에 이어 구단 득점 2위에 오른 이였다.


“데네르는 내가 생각하는 역대 최고 선수 5인 안에 든다. 펠레, 가린샤, 리오넬 메시, 펩 과르디올라(카타르에서 지도)와 함께 명단에 들어간다. 그는 홀로 경기를 승리로 이끌 수 있다. 펠레가 산토스와 브라질 대표팀에서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데네르가 뛴 A매치 두 경기는 전설적인 미드필더 출신 감독 파우캉 휘하에서 치른 친선전이었다. 하지만 더 많은 경기를 뛸 수도 있었다. 반짝이던 데네르는 소속팀에서 116경기에 출전해 42골을 넣으며 1993년 그레미우와 함께 리우 그란데 두 술 주 챔피언십에서 우승했고, 1994년에는 바스쿠와 함께 타카 구아나바라컵을 차지했다. 2019년 상파울루주 축구협회는 데네르를 기리는 의미에서 한 해 동안 유스 챔피언십에서 가장 멋진 골을 터뜨린 선수에게 주는 데네르 어워드를 제정했다.


하지만 기록과 명예만으로 역사상 가장 재능 있는 브라질 유망주를 정의할 수 없다. 데네르는 영원히 브라질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선수들, 즉 아름다운 경기를 만든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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